카톨릭의 최후를 예언한 성 말라키
성 말라키(St. Malachy O'Morgair, 1094~1148)는 12세기부터 현대, 미래에 이르기까지 고황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예언을 남겼다. 만약 성 말라키의 예언이 적중한다면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 이후에 더 이상 교황은 존재하지 않으며 로마카톨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 말라키가 무신론자여서 카톨릭의 부흥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성인 중에서도 가장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성 말라키의 예언은 1595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그 이후 늘 논쟁의 씨앗이 되어 왔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을 스스로 예언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신의 계시로 알려진 그리스의 델포이도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예언했다. 고대 히브리인 예언자들도 예루살렘의 붕괴와 국가의 멸망을 일찍부터 예언했다. 따라서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가 카톨릭의 소멸을 예언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말라키는 1094년 아일랜드의 알스타 지방에 있는 아마(Armagh)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학생 때부터 지식과 덕망이 높아 선생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다. 독실한 신앙을 가졌지만 결코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며 어느 누구와도 금세 친해졌다.
말라키는 젊은 시절 ‘은자隱者 이스마 아마’ 라는 작은 종교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본부는 은자들이 사는 좁은 방이었다. 그러나 아마의 주교 세르시우스가 말라키의 자질을 한 눈에 알아보고 곧바로 말라키를 부사제로 임명했다. 말라키가 교리문답을 거쳐 민중을 전도하게 된 것은 약관 25세의 나이였다.
그후 오래 지나지 않아 말라키는 방고아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편한 직책이 아니었다. 그 수도원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말라키는 정당한 대우를 받고자 스스로 고군분투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라키 그러한 고행을 감수하고 또 극복했다. 뿐만 아니라 말라키는 사람들로부터 "신에게서 기적과 예언을 한꺼번에 부여받은 인물"이라는 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말라키는 그 후 수년 동안 치루어졌던 아일랜드 교회 개혁에서 커다란 공을 세우고 그 일이 마무리되자 교황에우제니오 3세(1145-1153)를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향해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에 프랑스의 클레르보Clairvaux에 들러 성 베르나르도(Bernardus, 1090~1153)과 만났다. 두 사람은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당시 역사문헌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말라키는 이곳에서 교황에 관한 유명한 예언서를 집필했다고 한다.
9년 후 말라키는 교황 에우제니오 3세를 만나기 위해 다시 로마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여행을 지속할 수 없었다. 클레르보 가에서 성 베르나르도를 만났을 때 말라키는 갑작스런 병으로 친구 베르날의 품에 안겨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말라키는 1190년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재위 1187-1191)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르나르도가 말라키의 예언에 대해서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은 까닭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말라키 이외의 예언에 대해서는 공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궁금증은 더한 것이다. 말라키의 예언이 사후 4백년 가까이 지난 1595년이 될 때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이유도 또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어쨌든 예언이 발표되자마자 큰 논란이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가톨릭 교회 내에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1902년과 1903년에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죠셉 메톨 신부가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저서를 발표했다. <성 말라키에 의한 교황에 대한 예언>과 <교황제도에 관한 예언> 두 권이다. 이 두 저서에서 메톨 신부는 반대론자의 의견을 다양한 시각으로 검토하고 말라키의 예언이 충분히 믿을 만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말라키의 증언은 보통 크기의 종이로 인쇄하면 7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라틴어로 쓴 111어구語句는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1143년에 즉위한 첼레스티노 2세(1143-1144)부터 시작해 111명의 교황을 표현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선출된 끝에서 두번째의 교황은(즉 110번째 교황) "올리브의 영광" 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을 교황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교황에 대해서는 111명중 가장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원문해석은 다음과 같다
"신성 로마 교회가 마지막 박해를 받는 동안
왕좌에는 로마인 베드로가 앉아
시련을 맞고 있는 민중을 이끌게 된다.
그 시기가 지나가면 7개의 언덕을 가진 도시는 파괴되고
두려운 신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이 예언은 ‘파티마 제3의 예언’ 과 일치하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로마 추기경들은 공포에 떨었던 것인가. 그리고 이 이상의 충격을 던질 예언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언이 단순히 전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무서운 전쟁이라고 하면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일어낫던 것이다. 만약 예언의 내용이 또 한번의 커다란 전쟁을 예고한 것이라면 당연히 추기경들은 침통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을 터인데 공포로 얼룩진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고 해석해야 한다.
"7개의 언덕을 가진 도시가 붕괴한다"
말라키가 한 이 예언 속의 도시는 로마를 가리킨다. 만약 로마가 붕괴된다면 바티칸도 당연히 붕괴될 것이다. 말라키는 마지막 교황 이름이 ‘베드로’ 라고 적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은 초대 교황의 이름과 똑같다.
포만의 저서 <예언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성 말라키의 예언에는 마지막 교황에 대한 예언이 다른 교황보다 훨씬 상세히 적혀 있다. 로마인 베드로는 고난 속에서 민중을 이끈다. 7개의 언덕을 지닌 도시는 붕괴된다. 그리고 세계는 암흑으로 뒤덮인다. 그 후 약속된 여명이 도래한다."
이것을 해석해 보면 이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고 교회는 사상 유례없는 혹독한 박해를 받는다. 그 커다란 시련은 2천년 전 로마황제인 티토우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유태인들이 겪은 괴로움과 같은 것이다.
그 참혹함은 다음 <마태복음>에서도 표현된다.
"한 사람도 구원받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받는 자들 때문에 그날은 짧아진다.“ <24장 22절>
하지만 아무리 '로마인 베드로'라고 해도, 또 온 세상 사람들이 힘을 합쳐도 영원의 도시 로마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 베드로라는 인물을 마지막 교황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교황제도가 중단되고 후에 다시 영광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이 예언은 한편으로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교황들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적용시키고 있다. 복음서를 비롯한 많은 예언서에 기록된 세계의 종말은 진정 얼마 남지 않은 것일까?
현재의 교황에서 뒤에 즉위할 2명의 교황을 남기고 끔찍한 시기가 가까워져 온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성 말라키의 예언은 12세기 교황 첼레스티노 2세(1143-1144)부터 시작되는데, 그 이후 (2013년을 기준으로) 870년 동안 110명의 교황이 나왔는데 평균 재위기간을 보면 대략 8년 정도가 된다.
<아더 크로켓 지음, <노스트라다무스와 파티마예언>, 251-256쪽 요약>